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뮌헨 폭동 (문단 편집) == 독일투쟁동맹, 그리고 바이에른 정부 ==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3년 9월 1~2일 뉘른베르크 독일의 날 집회에서 극우 세력들은 <독일투쟁동맹>이라는 연합단체를 결성하였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오버란트 동맹]], [[제국깃발]] 등 온갖 남부 극우 단체들이 결집하였고 [[에른스트 룀]]의 사전공작으로 히틀러는 독일투쟁동맹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나치당과 달리 투쟁동맹에서 히틀러는 절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투쟁동맹 자체가 애시당초 다양한 생각과 꿍꿍이를 가진 이들의 [[오월동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투쟁동맹 참여자 중 힌덴부르크와 함께 명콤비로서 [[탄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있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투쟁동맹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잡고 있었다면 쿠데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투쟁동맹 내에서의 불확실한 위치로, 투쟁동맹 내부에서 쏟아져나오던 '''결단''', '''거사'''와 같은 요구와 압력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것에 있었다. 투쟁동맹 내 중간간부진들도 '''경제난과 사회 혼란 속에서 투쟁동맹 조직원들 및 일반인들이 극좌로 넘어갈 수 있다'''며 그러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결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이에른주 정부는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에 사실상의 독재권을 부여했다. 카르는 극좌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극우 세력의 집회 요청도 대부분 불허하는 등 적극적으로 치안을 통제했다. 내부의 압박 속에서 바이에른 정부마저 이렇게 나오자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우파민족적 정부 역시 '''결국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사실 바이에른주 정부 인사들도 결코 민주적인 양반들은 못 되었다. 이 인간들도 프로이센과 그들이 중심이 된 베를린의 사회민주당 좌파 정권에 대해 분노하긴 매한가지였고 이들은 투쟁동맹을 이용만 하고 팽한 다음에 베를린의 좌파 정부를 타도하고 군부독재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카르, 그리고 바이에른 주 경찰청장 한스 리터 폰 자이서, 바이에른의 독일군 지휘관 오토 폰 로소프 3인이 주축이 된 바이에른 정부 세력은 로마 진군을 모방해 바이에른과 그 주변의 준군사조직 및 무장단체를 총동원해 베를린으로 진군한 다음 거국적 독재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이를 위해 베를린의 육군총감 [[한스 폰 젝트]]와 면담했으나 젝트는 이 어설픈 계획에 전혀 찬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압의 의지를 표현했기 때문에 이들의 계획은 말 그대로 상상으로 끝났다. 젝트의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받은 바이에른 정부 인사들은 혈기넘치는 투쟁동맹을 제어하여 자신들의 통제 범위 바깥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일을 막고자 했다. 이들은 여러 루트를 통해 투쟁동맹에 압력을 가했으나 이는 역효과만 가져왔다. 히틀러는 계속되는 아래로부터의 궐기 요구를 받아들여 전격적으로 바이에른 주 정부를 장악한 다음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히틀러는 11월 6일 주요 참모들과 논의한 후 쿠테타를 결심했고 11월 7일 투쟁동맹 지도자 회의에 쿠데타 계획을 내놓았다. 쿠데타 시기는 바로 다음 날인 11월 8일이었다. 혁명 5주년 기념 행사가 근교 맥주홀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여기에는 카르, 자이서, 로소프가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